본문 바로가기
전시

표갤러리 - 김태호 개인전 질서의 흔적

by biitmul 2022. 10. 13.
반응형

 

표갤러리에서 김태호 작가 개인전을 개최하고 있어 방문했다. 
김태호 작가의 작품들은 워낙 아트페에 빈번하게 출품되어 자주 보긴 했었지만, 전시 공간에서는 처음 본다.
고즈넉한 서촌 골목 안쪽에 위치한 표갤러리까지 가는 길이 한적하고 좋았다.
 

김태호 화백은 박서보, 하종현, 윤형근과 함께 단색화 거장으로 불리운다.
실제로 박서보의 오랜 제자이기도 한 김태호 화백의 별세 소식에 박서보 화백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이 심금을 울리기도 했었다.
 
전시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 한국의 단색화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한 수행성, 동양 사상의 정신성이 강조되고 있다. 
김태호 작가 역시 캔버스 위에 물감을 쌓아올리는 작업을 반복하고, 안료가 굳으면 칼로 긁어내 어떤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쌓인 물감들의 흔적에 주목해 <질서의 흔적>이라는 제목을 붙인 듯 하다.  
 
 

(가장 왼쪽) Internal Rhythm: Blue Sphere

전시는 1-3층 전관에서 진행된다.
반층정도 계단을 내려가면 SPACE1이 나오는데, 김태호 화백의 미디어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미디어 작업은 처음 보는데, 주로 내재율 시리즈의 작품들이 평면에서 3차원으로 확장되고, 디지털 세계에서 물감을 넘어서 다양한 물성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왼쪽) Internal Rhythm: Blue Sphere, (오른쪽) Internal Rhythm: Red Sea

단색화의 미디어 버전을 보니 단색화의 수행성 측면이나 색감에서의 확장성이 갖는 가능성을 느낄 수는 있었다. 개인적으로 내재율의 변형된 형식을 볼 수 있는 작품이라 좋긴 했지만, (의도하신 것이겠지만)컬러의 RGB화로 너무 쨍한 색감이 된 것과 비전과 작품의 비율이 맞지 않아 프레임 안으로 검정색 빈 공간이 보이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러고보니 정사각형 비전은 없는 것인가..
 

Internal Rhythm 2018-78, Internal Rhythm 2018-32(부분)
Internal Rhythm 2018-11(부분)

김태호 작가의 그림은 독자적인 형식이 있어 멀리서 봐도 알아보기가 쉬워 가까이에서 오래 들여다본 기억은 많지 않다. 
 
그림 가까이 다가가니 일정한 비율을 두고 칼로 천천히 물감을 깎아내린 자국과 깎인 부분에서 드러나는 겹겹이 쌓인 물감의 다양한 색감들이 눈에 들어왔다. 순서에 맞게 쌓아 올려진 물감의 질서와 깎는 손에 들어간 강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만들어내는 우연성이 만나 만들어내는 무늬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러고보니 바둑판처럼 일직선이 처음부터 끝까지 곧게 그어진 것이 아니라 제각각 다른 선의 길이가 만들어내는 리듬감이 있었다. 
 

김태호, 내재율 Internal Rhythm 2019-32, 163 x 131 cm, Acrylic on canvas, 2019
(왼쪽) Internal Rhythm 2019-6, 163.5 x 131.5 cm, Acrylic on canvas, 2019, (오른쪽) Internal Rhythm 2019-32, 163 x 131 cm, Acrylic on canvas, 2019

SPACE3 전면에 걸린 두 작품이 주는 에너지가 좋았다.
공간과도 잘 어울리고 오른쪽 작품의 물감 층이 만들어내는 차이가 좋았다.
 
그러고보면 SPACE1을 보고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오히려 김태호 작가의 정수에 다가가게 되어, 지하에 미디어 작품을 둔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전시 안내문
표갤러리는 2022년 9월 15일 (목) – 2022년 10월 27일 (목), 김태호의 《질서의 흔적》을 개최한다.

한국 단색화의 거장이자 추상회화의 전설인 김태호의 작품은 한국 단색화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단색화’라고 하면 쉽게 단일 색조를 의미하지만, 한국의 단색화는 반복적 행위와 동양 사상의 정신성에 초점을 둔다. 김태호의 작업 과정은 인내와 장인 정신을 기반으로, 치밀성이 더해져 ‘내재율’을 탄생시킨다. 작가는 수없이 쌓아 올린 붓질로 스무 겹 이상 덧칠해진 안료가 어느 정도 굳으면 칼로 긁어낸다. 이때 표면의 단일 색면 밑으로 중첩된 다색의 색층이 은은하게 드러난다. 깎아내는 역설적 행위를 통해 숨겨져 있던 ‘질서의 흔적’이 드러나는 것이다.

김태호는 캔버스 평면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회화의 존재적 근원에 도전한다. 수직 수평의 그리드 구조로 칠해진 두터운 색층을 깎아 일렁이는 듯한 물감 층의 리듬을 생성하고, 빼곡하게 채워진 사각의 작은방들은 웅장함을 자아낸다. 김태호는 20년이란 긴 시간 동안 이 수행과도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그의 작품 안에서 질서를 확립했다. 우연성에 온전히 기대지 않고 그 질서를 기반으로 만든 작품은 리듬과 규칙이 공존하는 우주적 공간이 된다.

한국 단색화의 정신을 추구하면서도 한 시대의 미의식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김태호는 이번 개인전을 통해 더 면밀하고 생동감 있는 내재율을 선보인다. 특히 <Internal Rhythm 2022-57>은 가장 최근 제작된 내재율 작품으로, 이전부터 지금까지 진행된 내재율 시리즈 중에서 작품 과정의 현재 상태를 가장 잘 보여주며 이번 전시의 대표작으로 선정되었다.

출처 : 표갤러리 홈페이지

 

지난 주, 김태호 화백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한가지 스타일의 회화를 끝없이 탐구한다는 것은 어떤 삶을 살 때 가능한 일일까.
워낙 다양한 것을 추구하는 나로서는 그 자체로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수많은 물감 겹들을 보았을 때 작가가 칠해온 세월의 흔적이 다시금 새로이 다가왔다. 의미있는 시기에 전시를 만나고, 많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김태호 <질서의 흔적>
표갤러리, 2022.9.15-10.14

반응형